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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부르는 황야(석양)의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야기

by 지아나비 2023. 4. 11.
행운을 부르는 황야(석양)의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야기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건강하고 힘이 센 아이로 잘 자라란 뜻에서 삼손이라는 애칭을 붙이고 부릅니다. 무려 5.2kg으로 태어난 그는 그의 부모들의 기대했던 대로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행운의 사나이 삼손 첫 번째 행운

 

젊은 시절 클린트 이스트우드
젊은 시절 클린트 이스트우드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자라면서 삼손은 학업은 소홀히 하고 아르바이트에만 전념하며 부모님들의 속을 썩이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1950년 그에게 징집통지서가 떨어진 것이죠. 그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징집이 되게 된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참전을 선언했고 150만 명의 미군을 파견할 예정이었습니다. 그 여파에 휩쓸려 당시 냉전시 기였던 만큼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를 실시하던 중 징집대상에 포함이 되었고 삼손 또한 2년이라는 시간은 군대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여느 군사들과 다름없이 신병훈련소를 거쳐 기초군사훈련까지 마친후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신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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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참여한다는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포로 다가올 순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곧 그에게 첫 번째 행운이 다가옵니다.

어릴 적 수영선수 생활을 했었고 인명구조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알려지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훈련병 수영지도병으로 복무를 명 받았고 따라서 한국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전장에 참여하지 않고 의무였던 군복무를 편하게 받을 수 있게 된 삼손의 첫 번째 행운이었습니다.

 

 

행운의 사나이 삼손 두 번째 행운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복무를 하면서 주말에는 나이트클럽 경비원등의 아르바이트도 이어가게 되고 그뿐 아니라 여자친구도 사귀고 있는 중이었는데 일요일에 군 수송기에 숨어들어 시애틀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대범함도 보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근무지는 샌프란시스코였고 시애틀까지는 무려 1300km 군대라는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자칫 탈영의 위험도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자친구의 집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만 것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로 떠날 군 수송기를 놓친 그는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까지 복귀하지 못하면 처벌을 피하지 못할 상황에 처했는데 여기서 천만 다행이게도 샌프란시스코로 떠날 예정인 폭격기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해도 폭격기의 조종사는 군수물자나 레이더등의 물자들 때문에 사람은 조종사인 자신 단 한 명만 탑승 가능하기에 사람을 태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손사래를 칩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은 삼손을 끈질기게 부탁했고 결국 폭격기 뒷공간에 탑승하게 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폭격기 뒷공간에 탑승한 삼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삼손이 탔던 비행기는 엔진결함으로 태평양에 추락하는 사고를 겪게 됩니다.

 

 

 

다행히도 착륙시도는 두사람의 목숨을 구했고 두 사람은 구명보트에 오릅니다.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이번에는 구명보트를 덮친 큰 파도에 휩쓸리고 만 삼손. 구명보트에는 폭격기 조종사만이 남았고 그가 탄 보트는 삼손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삼손이 떨어진 지점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5km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수영선수를 할만큼 수영에 일가견이 있었던 삼손이 죽을힘을 다해 헤엄친다면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방향이었습니다. 나침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칫 반대쪽으로 헤엄친다면 육지는커녕 망망대해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선택을 해야만 했던 삼손은 모든 걸 운에 맡기기로 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헤엄친 그는 점점 힘이 다해갔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샌프란시스코란 대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발견하게 된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결국 헤엄쳤고 구조되게 됩니다. 이것이 삼손의 두 번째 행운이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삼손은 치료를 마친 뒤 부대에 복귀했고 무사히 제대까지 하게 됩니다. 제대 후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이어나가던 삼손.

 

행운의 사나이 삼손 세번째 행운

삼손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군생활당시 동료였던 척을 만나게 됩니다. 할리우드에 인맥이 있던 척은 삼손에게 배우오디션을 권유했고 이를 수락한 삼손에게 그의 인맥을 주선해 주게 됩니다. 애초부터 끼가 있었던 것인지 단번에 오디션에 합격한 삼손은 배우가 됩니다. 하지만 배우 생활 또한 녹록지 않았죠. B급영화의 조연과 단역을 전전하던 삼손. 그는 곧 인생에 반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1963년 이탈리아 감독이 미국 수출용의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데 촬영은 스페인에서 하고 저예산으로 촬영된다는 이유때문에 감독이 원한 배우를 찾기 무척 어려웠습니다. 저예산에 해외촬영 그리고 미국의 서부극을 이탈리아식으로 촬영한다는 것에 많은 배우들이 배역을 숙고하면서 주연자리가 빈 것입니다. 이에 감독은 당시 조역에 불과하던 삼손에게 주연자리를 제안했고 삼손은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주연이라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고 해외촬영도 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죠. 무사히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후에 그야말로 대박이 나게 됩니다. 

 

황야(석양)의 무법자
황야(석양)의 무법자

 

1964년 이탈리아에서 첫 개봉을 한 이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 '황야(석양)의 무법자'였고 그 영화의 주연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였습니다. 삼손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던 것입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이 영화는 일명 스파게티 웨스턴 혹은 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부르는 유럽식 서부극의 단초가 되었고 서부극 영화에서 황야의 무법자는 빼놓을 수 없는 대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5천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고 한화 약 650억의 초대박을 만들어 내게 됨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또한 스타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이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세 번째 행운입니다.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

 

 

 

황야의 무법자로 스타반열에 올라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서부극의 마초이미지에서 형사 역할로 널리 이름을 떨친 더티 해리 시리즈를 포함한 약 63편의 영화를 출연했으며 배우로서 뿐 아니라 감독으로도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1992)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 수상하게 됩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힐러리 스웽크는 여우주연상을 모건 프리먼은 남우 조연상을 받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남우주연상을 타지 못해 그랜드 슬램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클린트의 역작으로 남게 됩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 음악에도 참여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2016년에는 체슬리 "설리" 슬렌버거 비행기 기장의 실화 US 에어웨이즈 1549편 불시착 사고를 그린 '설리 : 허드슨 강의 기적'이란 작품으로 자신의 폭격기 추락 사고 경험을 살린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허드슨강의 기적이 일어난 US 에어웨이즈 1549편 불시착 사고
실제 허드슨강의 기적이 일어난 US 에어웨이즈 1549편 불시착 사고

 

그는 현재 90살이 넘은 고령임에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2021년 크라이 마초라는 작품 이후 은퇴작인 Juror #2를 마지막 작품으로 활동중임을 알렸습니다. 

이처럼 배우로도 감독으로도 유례없이 성공한 사례는 흔치 않은데 같은 길을 가려는 수많은 배우 겸 감독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부디 마지막 작품까지도 건강히 잘 마칠 수 있길 바라보며 오늘의 포스팅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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