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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일지(이춘재 8차범행도 자신의 소행이라 자백)

by 지아나비 2019. 9. 23.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일지(이춘재 8차범행도 자신의 소행이라 자백)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 이형호 군 유괴 사건, 그리고 화성연쇄 살인사건. 이사건의 이름들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엄청난 관람객들을 불러들인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명절특집 영화로도 몇 번이나 방영되었었죠.
세 가지 범행에서의 DNA가 일치하는 이춘재라는 용의자는 우여곡절 끝에 찾아내긴 했지만
여태껏 범행을 부인하고 있죠.
생색내기식의 수사가 아닌 진실을 알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래부터는 원하지 않는 혐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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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모자이크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실명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 범행

 

사건현장 보도장면
사건현장 보도장면

1986. 9. 14 화성군 정 나면 백리에서 채소밭을 일구고 생활하던 이 모 할머니(71세)
이 모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채소를 일궈서 읍내시장에 채소를 팔러 나갑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딸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이른 아침 6시에 딸의 밥 먹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집으로 향합니다.
초가을이라 농사일이 일손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바쁜 걸음 중 사건은 발생합니다.
1986. 9. 15 오전 6시 10분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할머니는 생을 마감합니다.
바로 연쇄살인범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1986. 9. 19 오후 2시 할머니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15일 범행을 당하고 풀밭에서 발견됩니다.
소에게 줄 풀을 베러 나왔던 목축업을 하던 분이 발견하고 신고를 하게 되죠.
할머니는 딸의 집에서 10분 자신의 집까지는 30분 거리의 안녕리 버스를 타러 나가던 중 범인을 만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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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는 벗겨진 채였으며 다리는 X자로 묶인 채였으며 손으로 목 졸라 살해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4-5일 만에 사체를 발견했지만 가을 이슬때문에 범인의 흔적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성폭행 흔적은 없었지만 질액의 양성반응으로 보아 성폭행은 없었지만 성추행은 있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양말과 떨어져 있던 담배
피해자의 양말과 떨어져 있던 담배
피해자의 신발과 떨어져 있는 담배
피해자의 신발과 떨어져 있는 담배

현장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담배도 발견되었지만 역시 증거는 자연적으로 훼손되어 있는 증거로서 효력은 없었으며 양말과 고무신등도 발견되었습니다만 역시 증거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쌈짓돈 얼마 안 되는 채소판돈을 범인이 가져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날 아침만 잡숫고 가셨어도....."

두 번째 범행

1986. 10. 20 오후 2시
송탄리 신정동 박 씨(25세)는 태안읍 송산리의 수양어머니 허모씨를 만나러 갑니다.
허모씨는 예쁘기로 소문난 박 씨에게 맞선을 주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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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는 어머니의 맞선 주선이 쑥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떴습니다.
박씨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예쁘게 차려입고 허모씨의 집으로 갔고 집에서 맞선남과 밥을 먹고
8시 50분쯤 수양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허모씨의 집을 나섰습니다.
농수로 둑길을 걷던 중 그만 범인을 만나고 맙니다.
이는 영화에서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향숙이 예쁘다'란 말을 남겼죠.
이 사건에서 향숙이 예쁘다는 말을 하는 마을의 한 청년을 붙잡고 추궁을 하지만
영화에서도 보셨든 그는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죠.

농수로에서 발견한 피해자
농수로에서 발견한 피해자

사건으로 돌아가서
1986. 10. 20일 22시 사라진 그녀는
1986. 10. 23일 오후 2시 50분 발견됩니다.
영화와 똑같이 농수로 안쪽에서 발견되며
피해자의 목에는 스타킹으로 목을 조른 흔적이 있으며 강간 후 살해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물론 성폭행이 있었으니 정액은 양성반응이었지만 범인 특정은 불가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 당시는 과학수사기법이 현재에 비해 많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가슴과 등에 드라이버나 송곳 같은 뾰족한 물체로 찌른 흔적이 4군데 발견되었으며
우유팩, 담배꽁초, 머리카락등의 증거자료로 B형의 범인이라는 것을 추정해 냅니다.
박 씨의 옷은 농수로 둑 위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녀가 느꼈던 고통을 대변하듯 얼굴에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가지고 있던 손톱깎이로 피부도 훼손하였다고 합니다. 너무도 잔인한 수법입니다.

한 여자의 생명을 유린하였을 뿐 아니라 훼손을 일삼으며 즐긴듯한 이 사건현장은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엽기적인 방법의 살인이었습니다.
이 현장은 1차 범행장소와 불과 4km의 거리였습니다.

세 번째 사건

1986. 12. 12 오후 6시
권 모 씨(24세)
동흥제과 공장에서 일하던 권 씨는 업무를 마치고 수원 세류동에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재촉으로 인해 10시 30분 버스를 타고 11시 조금 자니 서는 안녕리 삼거리에 하차하게 됩니다.
삼거리 바로 앞 정수섬유밑으로 작은 도로를 가던 중 피습을 당하게 되는데요 이때 집과의 거리가 100미터가 안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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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워낙 인적이 없는 곳이라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범인에 의해 논바닥으로 질질 끌려갑니다.
손은 묶인 채였고 스타킹 거들 팬티가 벗겨집니다.
거들과 스타킹으로는 입에다 재갈을 물렸으며 성폭행을 합니다.
그 후 스타킹으로 목 졸라 살해를 해버립니다.
하지만 권 씨의 시체는 무려 4개월 뒤에 발견되는데요 이는
신화기업 둑밑으로 쌓아두었던 모래부대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해자의 유류품
피해자의 유류품
피해자의 유류품
피해자의 유류품

그래서 이 권씨의 시체는 1987. 4. 23 오후 2시에 발견됩니다.
논두렁 보수작업을 하던 논주인 김 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당시 피 묻은 팬티를 머리에 씌운 채였으며 하의는 벗겨진 상태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재갈을 물리고 목 졸라 살해했습니다.
이 사체는 너무 늦게 발견되어 부패가 심해 부검이 불가능하였고 인적사항도 알 수 없을 수도 있었으나 피해자가 소지하고 있던 목도장에서 이름을 발견하여 권 씨임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이 권 씨의 사체가 발견되기 전까지도 범인의 범행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986. 12. 14 오후 11시
이 모 씨(21세) 정남면 관항리 들깻단에서 발견
3차 피해자 권 모 씨가 다니던 동흥제과 옆 안녕리 정수섬유에서 오전근무를 마치고 오후에는 수원시내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다고 합니다.
당시 맞선이라 함은 어머님들을 대동한 채 이야기를 나누다 어머님들이 눈치 봐서 빠져주는 형식이었으며 이 둘은 눈이 제대로 맞았던 탓인지 부모님이 가신 후에도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데이트를 하였고 이 모 씨는 막차가 끊기기 직전인 열 시 조금 넘어 버스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녀는 기숙사로 돌아갈까 하다가 늦은 시각까지 맞선은 잘 보았는지 별일은 없는지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와 오빠에게 소식을 알릴 생각으로 집으로 가기로 합니다.
마을에서 1Km 떨어진 정난면 면소재지에서 내렸습니다.
그날은 유독 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이곳은 버스의 종점이었고 이 씨는 이곳에서 실종됩니다.
이 씨의 가족들은 이 씨가 돌아오지 않자 맞선남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배웅을 해드렸다는 말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남면 버스에서 오후 11시에 목격되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없어진 그녀는
1986. 12. 21 오후 12시 30분에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실신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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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강 하천 둑 들깻단으로 덮여있었으며 블라우스로 손이 뒤로 묶여있었습니다.
거들을 머리에 쓴 채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습니다.
속에 입는 옷인 블라우스는 손을 묶는 데 사용하였으며 빨간색 투피스는 사체에다 입혀놓았다고 합니다.
범인의 엽기적인 행각이 이랬습니다. 마치 시신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듯 이리저리 옷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훼손도 하고 피해자의 몸에 이것저것 집어넣기까지 합니다.
들깻단 주위에서는 핸드백, 우산, 손수건등이 발견되었으며 우산 손잡이에서 혈흔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체의 하복부가 난 행 당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정액양성반응이 나왔지만 사건당일 비가 많이 오기도 하였고 일주일이 경과되었기에 증거들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B형 검출은 성공했습니다만 당시 이 씨는 B형이었으므로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
이씨의 우산손잡이는 휘어있다 범인의 잔혹성을 엿볼수있다.
이씨의 우산손잡이는 휘어있다 범인의 잔혹성을 엿볼수있다.

영화상에서 비 오는 날과 빨간 옷의 괴담은 이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비 오는 날의 범행은 두건밖에 되지 않았고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영화상의 연출이었다고 보입니다.

다섯 번째 범행


1987. 1. 10 토요일
홍양(19세)은 아주 착한 딸이었고 벌써부터 집의 보탬이 되려 하는 듯 이곳저곳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며 생계를 위해 취직을 서둘렀습니다.
그녀는 이력서를 내고 수원 북문에서 친구와 수다를 한참이나 떨었고 늦은 시간이란 것을 깨달은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향합니다.

이때 시간은 오후 8시 30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안읍에서 내려 진안리를 거쳐가면 20분이 더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원 세류돌을 지나 태안읍 진안리와 경계인 반정리 정류소 하차한 것이 8시 50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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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황구천 둑길로 걸어갑니다. 안녕리 낮은 산골마을을 보며 가던 중 둑 가운데서 짚가리들이 쌓여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범인이 습격을 합니다.
어김없이 그녀는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다음날 볏짚을 옮기려던 논주인에게 발견되었습니다.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
사건 일지
사건 일지

1987. 1. 11일 오후 1시
홍모 양 양손은 브래지어로 묶여 있었으며 목에는 목도리로 목을 조른 흔적이 있었고 현장에서는
머리카락, 음모, 찢긴 천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국과수에서는 범인의 혈액형이 B형임을 확신하게 되죠.
홍양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고 계셨고 어머니는 공장일을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안타까웠던 홍양은 봄이 되면 일을 하라는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둘러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착한 딸의 이 같은 마음이 이렇게 부서진 채 부모님의 가슴을 아프게 해 버렸습니다.
홍양은 중학교까지 학업도 우수하여 상장이나 메달이 80여 개에 이르렀으며 운동도 잘해 충남 도내에서 중학생 때 도대표 탁구선수로도 활약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재다능하며 착한 딸을 잃은 부모님은 너무나 슬퍼하며 허탈해하셨다고 합니다.
이 범행장소는 수사본부현장의 1km 안쪽이었으며 현재까지의 모든 범행이 태안지서에서 2km 안쪽이었습니다.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임을 공표합니다.
당시는 현재에 비해 과학수사가 매우 미흡한 수준이었고 경찰에서도 이에 관한 매뉴얼이 없었을뿐더러 수사방법도 발품을 파는 등의 관행적, 전통적이었습니다.
과학수사에 대한 교육도 없었으므로 수시로 증거물들이 위치가 바뀌어있기도 했으며 수사도 지지부진했습니다.
당시 수사라 함은 목격자 조사나 우범자나 전과자 조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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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지를 뿌리고 비슷한 수법의 전과자를 하는 식으로 수사 범위를 넓혀가다 보니 많은 20대에서 50대까지의 주민과 일반인들을 상대로 조사를 했으며 이 숫자는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범인의 정체는 알지도 못한 채 용의자만 늘어난 화성은 점점 공포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섯 번째 범행

4월 3차 범행의 희생자인 권 씨가 발견되었습니다.
마을은 어수선하였고 여자들은 자연스레 밤에 외출을 자제하게 되었죠.
권 씨가 발견된 후 한 달 뒤인 1987. 5. 2 토요일 저녁
박 씨는 태안읍을 관통하는 수원 인천 사업도로의 바로 위에있는 진안리의 가정주부였습니다.
박씨는 밤 9시가 넘어서 비가 세차게 오는데도 남편이 오지 않자 우산 들고 마중을 가게 됩니다.
청색 트레이닝복 아래위로 입고 속에는 블라우스 하나를 걸친 채였습니다.
그녀는 9시 30분에 버스정류장에 도착했고 10시까지 남편을 기다리지만 남편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10시 30분에 수원에서 집에 오는 버스를 타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11시쯤 정류장에 도착한 그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뛰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착한 집에서는 아내가 집에 없어 이웃집 마실 간 줄 알고 밤새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고 거의 뜬눈으로 다음날 출근을 하게 됩니다.
출근해서 여기저기 전화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고 결국 실종 이틀째가 되는 날 가출인 신고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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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들은 수사를 시작하였고 마지막 목격자가 있었던 버스 정류장 바로 아래의 논에서 논주인이 모내기를 하다가 샌들을 발견했지만 누가 잃어버린 것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일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별 성과 없이 일주일이 지나갑니다.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
남겨져 있는 발자국
남겨져 있는 발자국

1987. 5. 9 15시
방과 후 야산을 넘어 집으로 귀가하던 아이들의 눈에 무덤옆 소나무를 가지 쳐놓은 더미에서 시체가 발견되게 됩니다.
아이들은 곧바로 신고를 하였고 경찰들이 몰려옵니다.
박 씨의 시신은 상체가 정말 벗겨진 채였고 손이 뒤로 묶여있었습니다.
목엔 브래지어와 블라우스로 목 조른 흔적이 있었으며 트레이닝 바지는 다시 입혀져 있었습니다.
234mm의 족적과 함께 주변 우산두 개와 파란 트레이닝복 상의와 팬티도 발견했습니다.
이에 남편은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죠.
국과수에서는 트레이닝복 상의에서 정액을 검출하는데요 이 정액은 A형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박 씨의 남편 또한 A형이었고 부부사이에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증거기도 했고 그동안 발견했던 증거들은 대부분 B형이었기 때문에 경찰들은 한 가지의 조건을 더 붙이고 범주를 넓혀갑니다.
범인의 단독범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범행에는 약간 틀린 점도 있습니다.
재갈이 물려 있지 않았으며 얼굴에 거들 같은 것으로 덮여있지도 않았으며 혈액형이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극히 인적 드문 곳에서 범행을 하던 범인이 대로에서 납치를 한 점도 약간 틀립니다.
정류장은 밤에도 차들이 쌩쌩 달릴 만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수도 있는 곳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혹시 면식범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지인이었다면 비 오는 밤에 따라서 야산까지 갈 일이 있겠느냐 하는 의문도 남았고 낮은 확률일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여기까지 경찰의 무능함을 본 시민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언론은 연신 매스컴을 집중 공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사 범행

1987. 12. 24

M모군이라고 합니다
M모군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사 오신 케이크를 먹으려다가 가족들과 같이 먹으라는 꾸지람에 마음이 상했던 김 모 씨(18세)는 집을 뛰쳐나옵니다.
그녀는 가톨릭대 간호학과를 떨어져 잔뜩 예민해져 있어서인지 쉽게 마음이 상해버렸습니다.
사소한 야단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 같았습니다.
집을 나와서 농수로를 걷던 김 씨는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1988. 1. 4 수원 화서역 근처 논 볏짚 속에서 웅크린 채 죽은 김 씨 발견
논주인인 김 모 씨가 자신의 논에서 엎드린 상태로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스타킹과 속옷으로 결박당한 피해자를 발견합니다. 스타킹과 속옷으로 결박당한 상태로 하의는 벗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자신의 꾸지람으로 딸이 집을 나갔다고 말하며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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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시신을 유기한뒤에 현장 근처에서 대변을 보고 갔다고 합니다.
그 대변으로 B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검거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사건현장 주위에서 옷가지를 태우다 검거되게 됩니다.
범인은 19세의 J군과 16세의 M 군입니다.
이들은 형사가 빈종이를 주고 약도와 시신 유기장소를 정확히 지목한데이어 김 모 양 시신에서 M군의 머리카락이 발견된 것을 확인하고 정황상 범인이 유력하다며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송도중 M군이 넘어지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뇌출혈로 사망하고 맙니다.
이송을 담당했던 형사는 업무처리불이행으로 직위해제와 함께 징역을 살게 됩니다.
이에 탄력 받은 J군의 어머니는 심문이 강압적이었고 억지진술을 강요해 왔다고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는데요 결국 J군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두 명의 용의자를 잡았지만 한 명은 어이없게 죽고 한명은 어이없게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는 자백 과정이 고문에 의해 진행된 것이며 머리카락도 조작된 것이라며 이 증거들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경찰이 맥없이 당한 이유는 취조과정 중 구타가 있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사실 J군이 의심 가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 당시 나돌고 있던 몽타주는 J군의 실제 모습과 흡사하기도 했고 다음 해 입대한 J군의 일병휴가 나올 즈음 7차 사건이 발생한 것과 전역시점에 8차 사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격자의 말로는 군인처럼 머리가 짧았다는 증언도 있었기 때문에 의심은 가지만 증거가 없으므로 더 이상의 수사는 불가능했습니다.

 

일곱 번째 범행

1988. 9. 7
안모 씨 (당시 54세)
때는 88 서울올림픽 열흘 전이었습니다.
장남이 운영하고 있던 수원의 분식점에서 일손을 돕던 안모 씨는 저녁 8시 40분 수원극장 맞은편에서 발안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재리에서 내려 야산을 넘기 위해 작은 길을 걸어 작은 하천을 건넌 뒤 야산을 넘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야산을 넘던 중 범인에게 납치되어 미루나무가 있는 산위쪽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피해자의 유류품
피해자의 유류품

안모 씨의 남편은 친척들에게 연락을 하고 다음날 날 밝자마자 찾아 나서게 됩니다.
발견은 남편의 사촌동생인 45세 백 모 씨가 발견하게 되는데요 풀숲에서 피가 흥건한 안 씨가 반듯하게 눕혀진 채 발견됩니다.
양손은 블라우스로 묶여 있었으며 입에는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있었습니다.
역시 성폭행 후 블라우스 끈으로 질식사시켰습니다.
육안으로 보았을 때는 쥐색치마가 입혀진 채였지만 국과수 부검 감식결과 안 씨의 질내부에서 복숭아조각이 발견됩니다.
범인은 납치 후 성폭행한 뒤 살해 후 복숭아를 먹었겠죠 그 복숭아를 먹다가 장난 혹은 호기심으로 먹던 조각을 넣은 것 같습니다. 먹던 복숭아 조각과 함께 양말을 국부에 집어넣은 채 그것도 모자라 우산으로 난행을 저지릅니다.
이때 사실 용의자라고 잡힌 남자가 있습니다.
수원 세류동에서 거주하던 22세 김 모 씨인데요 사건현장 주위를 배회하다가 잡혔습니다.
경찰은 이 김 씨를 추궁하며 몰아붙였지만 김 씨에게는 증인이 여럿 있었고 알리바이도 증명이 됩니다.
언론은 무능한 경찰이라 연일 질책하였고 결국 화성 경찰서장은 경질되기에 이릅니다.

 

여덟 번째 범행

1988. 9. 16 오전 6시 50분
화성군 진안리 야산 북쪽 기슭 한집에서 박모양(13세)이 죽어있는 것을 어머니가 발견합니다.
학교 갈 시간이 되었지만 딸이 깨지 않자 깨우러 갔지만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아 이상함을 느끼고 이불을 걷습니다.
하의는 벗겨진 채였고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말라붙어있는 것을 그제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목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있었습니다.
여태까지의 화성연쇄살인과는 많이 다른 범행패턴에 의아해졌습니다.
사건현장에서는 범인의 음모와 슬리퍼 그리고 족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모발도 발견되었는데 모발에서는 티타늄이 많이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용접이나 페인트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화성일대 32군데 화학공장 종업원들을 일제 조사 모발과 음모를 수거합니다.

당시 보도 자료
당시 보도 자료
당시 보도 자료
당시 보도 자료

이것으로 인해 무려 1500명의 남자들이 음모가 뽑혔다고 합니다.
너무도 막연한 수사방법이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용의자를 찾아냅니다.
범인은 윤 모 씨
여태까지의 화성 사건 감정중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윤 씨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양의 언니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며 그 언니를 강간하러 갔었지만 동생방을 잘못 들었다고 합니다.
동생인 박양이 저항하자 목 졸라 살해하게 됩니다.
여태까지의 사건들과는 너무도 다른 전개를 가지는 이 사건에 대해 의아해합니다.
손발의 결박도 없었고 범행장소도 집이라는 한 번도 없던 장소였으며 보통 피해자의 의상을 이용해 목을 졸라왔던데 반해 맨손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용의자를 검거하고 추궁해 들어가지만 이전 사건들과 관련성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에 대해서만 용의자 검거를 알리게 됩니다.
사실 이 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과 관련이 없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여덟 번째 사건으로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
사실상 10차 살인까지 있지만 현재 밝혀진 바로는 9명의 피해자가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범행

7차인 안모 씨의 범행이 있은 후 14개월이 지나게 됩니다.
마을주민들은 흉흉하던 분위기에서 어느 정도 안심하게 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녀자들은 여전히 밤늦게 다니는 것은 꺼리게 되었습니다.
워낙 흉흉했던 탓인지 마을의 야산에는 경찰들이 야간 순찰을 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성군 태안읍 능리 김양(14세)이 9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습니다.
때는 1990. 11. 15. 22시 이날은 김양의 생일이었습니다.

피해자 발견 장소
피해자 발견 장소
피해자의 유류품
피해자의 유류품

김양의 부모님은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친척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며 근교인 능리와 병점리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9시 50분 삼촌인 김 모 씨(33세)가 태안읍 병점 5리 야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김양은 하얀 속바지 차림이었고 그 위에 교복이 덮인 채 죽어있었습니다.
이 산은 앞에서 말한 야간 초소가 있던 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참변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양손과 양발은 검은색 스타킹으로 결박되어 있었고 브래지어로 재갈을 물린 채였습니다.
스타킹과 블라우스를 이용해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성폭행 후에 손발을 뒤로 활처럼 스타킹으로 묶은 채였으며 문구용 칼로 양쪽가슴을 20회가량 얇게 벤 자국도 있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증거물은 다수 있었으며 부검이 가능했습니다.
부검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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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칼로 난도질한 채였으며 수저, 포크, 볼펜등이 질 내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위장 내 잡채가 발견되었는데요 위장내 음식물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면 음식을 섭취한 뒤 두 시간 이내에 죽은 경우에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김양은 5시 친구 이모양과 함께 병점초등학교 앞에서 헤어지게 됩니다.
생일이라 아침에 잡채를 먹고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먹었다 치더라도 범행시간의 두 시간 전에는 가능한 일은 아닌 듯 보였는데요 추측하건대 점심시간 먹고도 남은 잡채를 범인이 발견하고 이를 억지로 먹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고 합니다.
도시락통에서는 식별가능한 지문을 발견하였고 머리카락 40개와 B형의 혈액형을 감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열 번째 범행

피해자 발견 장소
피해자 발견 장소
피해자 발견 장소
피해자 발견 장소
피해자 발견 장소
피해자 발견 장소

이번 범행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발생됩니다만 역시 화성군에 속하므로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태안읍에서 떨어진 동탄면 반송리 야산
권모(69세) 할머니는 수원 매탄동에 살고 있는 큰딸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봉변을 당했다 전해집니다.
딸의 집에서 저녁 6시 반정도에 나온 권 모 씨는 수원서 8시경에 버스를 탑니다.
9시경에는 동탄면 오산리 버스정류장에 하차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송리 쪽으로 도보를 하던 중에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다른 사건들과 다르게 재갈은 묶여있지 않았고 손 또한 묶여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 7차처럼 양말을 질내삽입한 채였다고 합니다.
B형의 정액이 검출되었으며 성폭행 후 질식사 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지문이 발견되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 야산은 권 모 씨의 집에서 200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양상은 약간 틀리지만 범인의 혈액형과 동일한 화성군이라 10차 사건으로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 불리는 사건들은 영원히 끝나게 됩니다.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로 말이죠.

 

그리고 현재

그러던 2019년 9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특정되었다는 뉴스가 연일 올라옵니다.
무려 세 건의 사건현장에서 검출되었던 DNA와 일치하는 용의자를 찾았고 그 용의자는 이미 무기수로 수감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화성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 시점인 1991년 결혼을 하게 된 이 씨는 1994년 1월 13일 집에 찾아온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수로 복역 중이라고 합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인 DNA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성에서 일어난 사건의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5,7,9차 범행에서 발견된 DNA는 이 씨의 것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4차 범행의 DNA 조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심지어 이 씨는 사건이 일어날 당시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거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밝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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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태껏 그는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는 B형이 아니라 O형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시 경찰이 몇 안 되는 증거에 의존하고 있던바 꼭 쥐고 있던 카드 중 하나가 B형 혈액형이기 때문에 지금도 오류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현재 이 사건은 2006년 마지막 사건의 공소시효를 마지막으로 더는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만 피해자들의 가족들과 피해자는 이것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정말로 가슴 아픈 사건 빨리 해결되길 바랍니다.

범인 이춘재 당시 몽타주와 당시 모습
범인 이춘재 당시 몽타주와 당시 모습

2019년 10월 1일 추가글

경찰은 이춘재를 9차례에 걸쳐 대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춘재가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고 합니다.

여태껏 범행을 전면 부인 하던 그의 입이 드디어 열렸습니다.
10차까지의 사건중 이미 다른 범인이 특정된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 외 5건의 범행이 더 있었다고 자백하여 화제입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 전후의 3건의 미제사건과 더불어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도시인 청주에서 2건의 추가범행도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경찰이 보유하고 있던 5,7,9차의 DNA증거가 있던 세 건 외에 의혹이 있던 모든 건에 대해 자백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 일까요? 추후 진술을 번복하진 않을지...
물론 아직은 이춘재의 자백만이 있는 상황이고 일일이 검증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미 공소시효는 만료되었지만 진실규명이 과제인 만큼 훗날의 기사도 기다려봅니다.

2019년 10월 4일 추가글

현재 8차의 범행은 범인이 잡혔고 1차부터 10차까지 중 8차가 빠진 9명이 화성연쇄살인 사건이라고 규정 지었으나 이춘재가 8차 또한 자신의 범행이라고 밝혔습니다.
사건의 방향이 이상해집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8차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현재까지 구치소에 있는 범인은?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 당시 경찰들의 고문과 폭력이 동원되었고 어쩔 수 없이 자백한 것이라면?
모든 게 명확해지면 추가글 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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