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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공포의 마티고개 화성 연쇄 살인 원조격, 강창구 사건 재조명

by 지아나비 2025. 6. 14.
공포의 마티고개 화성 연쇄 살인 원조격, 강창구 사건 재조명

연쇄 살인범 강창구
연쇄 살인범 강창구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이춘재의 원조격인 살인범이 있다? 오늘의 포스팅은 공주 일대를 공포로 밀어넣은 사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로 강창구의 이야기 입니다. 그 수법이 매우 잔혹한 범죄로 기록되고 있는 이 사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Contents

    사건 개요

    강창구 연쇄 살인 사건

    1980년대 중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과 반포면 일대에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고요했던 시골 마을에 연이어 여성들의 시신이 발견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처음에는 그저 불운한 사고나 단순 변사로 치부될 뿐이었죠. 그러나 이 모든 비극의 뒤에는 한 남자의 뒤틀린 욕망과 증오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강창구. 그는 1983년 7월부터 1987년 4월까지 무려 6명의 여인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한 명에게 몹쓸짓을 하려다 미수에 그친 연쇄 살인마였습니다. 그의 범행 방식은 훗날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이춘재'와 소름 끼칠 정도로 유사해 '화성 연쇄 살인의 원조격'이라는 섬뜩한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강창구
    강창구

     

     

    사건 배경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증오로 가득찬 범죄자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육체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오른쪽 눈의 사시, 간질병, 그리고 소아마비로 인한 왼쪽 다리의 불편함은 그에게 잔인한 놀림과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습니다.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자란 그는 특히 여성들이 자신을 경멸하고 피하는 것에 극심한 증오심을 품게 됩니다. 이 깊은 열등감과 뿌리 깊은 트라우마는 결국 폭력적인 성범죄와 다른 사람들을 해하는 끔찍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으로 인한 사회적 소외감을 비틀린 복수심으로 해소하려 했습니다.

    범행 일지

    강창구의 잔혹한 범행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1983년 7월 31일, 첫 희생자

    1983년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의 마지막 날, 공주시 우성면 소룡골 계곡에는 50대 여인이 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 고요한 계곡에서, 그녀는 강창구를 마주하게 됩니다. 잔혹한 몹쓸을 당한 후, 강창구는 그녀를 차가운 계곡물 속으로 밀어 넣어 익사시켰습니다. 주변에서는 단순한 익사 사고로 처리했고, 아무도 이 비극이 한 남자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살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살인의 그림자는 그렇게 처음 드리워졌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1984년 2월 21일, 두 번째 희생자

    첫 범행 이후 약 7개월이 지난 이듬해 겨울, 2월 21일의 스산한 날. 71세의 고령 여인이 공주군 반포면 봉곡리, 계룡의 야감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녀 또한 강창구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인을 납치하여 몹쓸짓을 했고, 결국 자신이 두르고 있던 허리끈으로 그녀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이 사건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단순 변사로 처리되었고, 진실은 차가운 땅속 깊이 묻히는 듯했습니다. 강창구의 대담함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1985년 7월 26일, 세 번째 희생자

    두 번째 범행으로부터 1년 반 이상이 지난 1985년 7월 26일. 이번에는 공주시 반포면의 마티고개에서 40대 여인이 강창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뒤 주머니를 뒤져 현금 15,000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시신은 한 달 뒤에야 발견되었습니다. 한여름의 높은 기온 속에서 시신은 이미 심하게 부패해 있었고, 이로 인해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전히 범죄의 실체는 모호한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1987년 1월 29일, 네 번째 희생자

    세 번째 사건 이후 약 1년 6개월 만인 1987년 1월 29일, 다시 마티고개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마티고개 정상의 산길에서 47세 여인이 강창구에게 살해당하고 현금 14,600원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이 가출 신고를 하면서 경찰이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주의 깊게 보게 된 것입니다. 어둠 속에 묻힐 뻔했던 연쇄 살인의 고리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2월 28일, 다섯 번째 희생자

    네 번째 범행이 있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87년 2월 28일. 이번에는 반포면 마리 소재 농로에서 57세 주부가 강창구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부를 성폭행한 뒤 잔혹하게 살해하고 현금 18,600원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이 희생자의 시신은 비교적 빨리 발견되었고, 앞서 발생했던 사건들과의 연관성이 의심되면서 경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7년 4월 1일, 마지막 희생자

    강창구의 마지막 범행은 그의 검거를 앞둔 1987년 4월 1일에 일어났습니다. 다시 마티고개에서 47세 여인이 살해당하고 현금 44,900원이 사라졌습니다. 이 희생자의 시신은 신속하게 발견되었고, 결정적으로 시신에서 범인의 음모(陰毛)가 발견되는 중대한 단서가 확보되었습니다. 이는 강창구를 특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날은 강창구의 잔혹한 연쇄 살인 행각에 종지부를 찍을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강창구 참조 이미지
    강창구 참조 이미지

     

     

    수사와 검거

    초기의 세 사건은 경찰의 미흡한 수사 시스템 탓에 그저 '변사'라는 이름으로 처리되어 자칫 묻혀버릴뻔 했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사건부터 연이어 발생한 살인 사건과 시신이 빨리 발견되면서 경찰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수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특히 여섯 번째 희생자의 시신에서 범인의 음모라는 결정적인 단서가 확보되었고, 이는 수사에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칠성암 주지 스님의 증언이 빛을 발했습니다. 스님은 마티고개 정상에 자주 나타나는 '검은 옷을 입고 사 눈을 가진 30대 남성'에 대한 묘사를 상세히 들려주었죠.

     

    이 증언을 들은 신경사는 강창구라는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강창구가 이전에 목장에서 일했으며 스님의 묘사와 외모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4월 6일, 신경사는 강창구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검거 당시 "언젠가는 잡으러 올 줄 알았다."며 담담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잡으러 온 초등학교 동창 형사들에게 "범인이 잘 잡히겠냐?"며 능청스러운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강창구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결국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들을 모두 자백했습니다.

    판결

    강창구는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90년 4월 17일 서울구치소에서 그의 형은 집행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전, 그는 자신의 눈과 콩팥을 기증하며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강창구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범행 수법이 화성 연쇄 살인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한때 동일범 논란이 일기도 했고, 초기 경찰 수사의 미흡함으로 인해 억울한 희생자가 더 발생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의 허술했던 수사 시스템의 한계와 연쇄 살인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건이 남긴 숙제

    이 사건은 또한 단순 변사 처리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전산 시스템의 부재 등 경찰 시스템의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범죄학 연구에서는 범행 유형 분류 및 분석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실제로 초기 세 사건의 경우 경찰은 변사체에 대한 실질적인 검증이 없었고 단순 변사 처리를 함으로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감안하여야 할 점도 있습니다. 이춘재 사건이 오랜 시간이 지난뒤 DNA라는 최신 과학수사로 덜미를 잡아낼수 있었던 것처럼 이사건은 이보다 더 전(범행이 겹치는 기간도 있지만)부터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고 그 당시의 수사한계란게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사건과 이춘재의 사건이 현재에 발생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여려명의 피해자가 발생하기 전에 검거된다고 확신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이지만 특히 '착취형 강간'이라는 범행 유형에 대한 심층 분석과 화성 사건과 같은 유사 사건들과의 연계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연쇄 살인 범죄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접근과 수사 기법 발전의 중요성을 시사했습니다.

     

    강창구의 사형 집행으로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이 어두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연쇄 살인 범죄에 대한 경고와 수사 시스템 개선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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