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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들어낸 세기의 걸작 명화 카사블랑카

by 지아나비 2023. 4. 5.
우연이 만들어낸 세기의 걸작 명화 카사블랑카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해 낸 영화. 영화 100년 사 최고의 명대사로 손꼽히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이라는 명대사를 만들어낸 영화. 탄탄한 구성과 배우들의 명연기가 어우러져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 포스터
카사블랑카 포스터

카사블랑카는 북아프리카 대서양 해안에 위치한 모로코의 최대항구도시이며 일년내내 쾌적한 날씨와 아름다운 해변을 가지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곳이었는데 '카사블랑카'라는 동명의 영화로 인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세계 2차대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4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세 개의 수상을 하는 기염을 토하였으며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영화사 100년 명작 100편 중 3위를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시나리오 각가조합에서 뽑은 101편의 위대한 시나리오중 1위를 차지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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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영화의 선전은 정작 배우들과 영화 스태프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합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이 영화를 만든 워너브라더스사의 뜻대로 된것이 하나도 없었고 당시 영화를 양산하던 추세로 평범한 저예산 영화로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카사블랑카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우연이 만들어낸 걸작 영화

먼저 이 모든 배경에는 헐리우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사가 있습니다. 바로 워너브라더스인데요, 당시 워너브라더스에서는 1년에 약 50편의 영화를 출품하며 당시 할리우드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워너브라더스에서는 '카사블랑카'의 원작인 'Everybody comes to Rick's(모두들 릭에게 모이다.)'라는 흥행에 실패한 작품의 판권을 사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약 2만달러를 지급한 워너브라더스, 이 가격은 당시 판권 매입가격의 약 4배의 비싼 가격이었고 이에 따라 영화 제작 비용이 절감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 최초 카사블랑카의 여주인공역은 프랑스 여배우 미셸 모르강을 점찍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름다운 눈과 지적인 분위기로 뭇 남성들의 사랑을 차지하고 있던 배우인데요, 이것은 결론적으로 불발이 되었습니다. 미셸 모르강이 요구한 출연비용은 약 5만 5천 달러였고 안 그래도 판권을 비싸게 사들인 워너브라더스에서는 제작비의 여유가 없었고 이로 인해 캐스팅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여성이 잉그리드 버그만이었습니다. 당시 잉그리드 버그만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작품의 캐스팅에 탈락한 상태로 미셸 모르강이 요구한 5만 5천달러의 반도 안 되는 약 2만 5천 달러에 출연을 약속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후 잉그리드 버그만은 '카사블랑카'가 대성공을 거두게 됨으로써 탈락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다시 캐스팅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인생은 이 '카사블랑카'라는 작품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녀는 잇따른 흥행작들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스타반열에 들게 됩니다.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

  • 남자 주인공이었던 험프리 보가트 또한 애초의 계획과 엇나간 캐스팅이었다고 합니다. 최초 캐스팅은 조지 크래프트로 낙점할 예정이었지만 조지 크래프트는 이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시나리오 보는 안목이 형편없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작품을 선정할때 동전을 던져 시나리오를 선택했다고 전해집니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조지 크래프트의 출연은 무산되었고 이에 기회를 얻은 사람이 바로 험프리 보가트였습니다. 그는 당시 크고 작은 조연을 해오던 주목받지 못한 배우였는데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카사블랑카'에서 트렌치코트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모습이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하죠.

험프리 보가트
험프리 보가트

  • 촬영이 시작된 후에도 난관은 있었습니다. 바로 주인공 배우들의 키 문제였습니다. 당시 잉그리드 버그만은 173cm였고 험프리 보가트는 168cm였습니다. 로맨틴한 장면을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는 키차이였고 이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제작진. 두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 험프리 보가트의 발밑에는 항상 상자를 두게 되었습니다. 두 배우의 로맨틱한 장면들에는 발밑 상자가 항상 같이 출연한 것입니다. 앉은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험프리 보가트가 소파에 앉아 있을 때는 엉덩이에 쿠션을 끼워 넣어 그의 앉은 모습도 잉그리드 버그만보다 크게 보이게 연출했습니다.

 

  • 배우들뿐 아니라 감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 '카사블랑카'의 감독은 윌리엄 와일러로 내정되어 있었고 그는 훗날 '로마의 휴일', '벤허'등의 명작을 배출해낸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 와일러는 갑자기 군입대를 결정하게 되면서 이에 메가폰은 마이클 커티스 감독에게 돌아갑니다. 마이클은 혹독하기로 유명한 감독 이었는데 실제로 그가 '노아의 방주'라는 영화를 찍을 때는 홍수장면에서 여러 명의 엑스트라가 익사하는 사고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실감 나는 사람들의 공포를 찍어내기 위한 감독의 결정이었고 사람들에게 미리 위험 경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촬영하기 원했던 거죠. 하지만 워너브라더스에 더는 대안이 없없고 결국 메가폰을 마이클 커티스 감독에게 맡기게 됩니다.

마이클 커티스

  • 세기의 명대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은 원문으로 'Here's looking at you.'입니다. 이 말은 원래 영국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유래된 말인데 당시 소매치기가 극성이라 술잔들고 건배하는 척하며 지갑을 훔쳐가는 사례가 잦았고 이에 소매치기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말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라고 하는 뜻이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촬영대기 시간에 잉그리드와 카드게임을 하던 도중 보가트가 무심하게 '속임수 쓰지 마. 지켜보고 있어.'라고 한 것이 영화의 로맨틱한 장면과 어우러지면서 사랑의 밀어로 재탄생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이 말은 세기의 명대사로 남게 되었는데 결국 이 말은 보가트의 애드리브이었단 것이 알려지면서 또 화제가 되었습니다.

 

  • 영화 속에 삽입된 음악 또한 '카사블랑카'를 통해 세계적인 히트팝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 곡은 'As Time Goes By'란 곡입니다. 이곡은 사실 영화가 만들어지기 1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곡으로 영화의 원작자가 배낭여행을 하던 중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듣고 영화의 메인 테마곡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 곡 또한 명곡이 되었죠.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실제로 연주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당시 재즈의 여왕이라 일컫던 엘라 피츠제럴드가 출연하기로 했던 장면은 엘라의 스케줄이 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었고 이에 또 급히 둘리 윌슨이라는 사람이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피아노 연주를 할 줄 몰랐고 결국 연주 장면은 피아노 소리를 따로 입혀 사용할 수밖에 없었죠.

 

  • 촬영은 시작되었는데 대본 또한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나리오 작가 무려 7명이 촬영진행과 동시에 대본을 쓰는 진풍경을 연출했고 이는 현재 쪽대본의 원조라고 할만한 장면이었죠. 심지어 결말까지도 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 불후의 엔딩장면을 연출해 내는데 카사블랑카 공항씬입니다.

  • 행운은 영화제목에서도 이어집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두가 릭에게 모이다.'라는 원 제목은 워너브라더스의 사주였던 잭 워너의 고집으로 영화속 등장하는 지명인 '카사블랑카'로 제목을 바꾸게 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의 고집은 엄청난 행운이 됩니다.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연합 항전을 촉구하는 협정을 맺게 되는데 이 협정이 카사블랑카 회담입니다. 자연스럽게 지명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국제적으로 이슈화가 됩니다. 의도치 않게 영화의 제목 '카사블랑카'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잭 워너
잭 워너

 

1942년 5월 25일 드디어 첫촬영이 시작되는 날이 되었지만 촬영을 진행할 스튜디오는 물론 세트장조차 완성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미국이 참전을 선포한 다음날에 시나리고 초고가 나오는데 일본의 본토침공에 대한 공포가 있던 미국은 폭격 위험으로 인해 할리우드의 야외 촬영 금지령을 내려버립니다. 영화 촬영 시작을 앞둔 시점의 날벼락이었죠. 결국 미봉책으로 세트를 만들기로 하는데 모로코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야 하는 거리는 조악한 세트장으로 물자절약을 위해 다른 영화 소품으로 쓰였던 상점 간판을 불어로 바꿔달기도 합니다. 또한 멋지게 날아가는 비행장면은 모형 비행기로, 불후의 엔딩장면이었던 카사블랑카 공항장면 또한 엉성한 종이로 만든 세트장을 가리기 위해 안개 제조기를 이용해 안개 낀 공항을 연출했죠. 하지만 정작 카사블랑카의 날씨는 1년 내내 쾌적한 맑은 날이 계속되는 곳인데 반해 어쩔 수 없이 안개 자욱한 도시로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드넓은 공항처럼 보이는 세트장의 원근법을 살리기 위해 멀리 서있는 사람은 신장이 아주 작은 장애인에게 연기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장면이 할리우드의 세트장에서 촬영되었고 당시 기술로서의 아름다운 모로코 카사블랑카를 완벽하게 연출해 냅니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여담

 

이처럼 이 모든 우연과 우연들이 만나 '카사블랑카'는 20세기의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카사블랑카'의 배우들은 카사블랑카에 단 한 번도 찾아간 적 없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찍었던 배우도 스태프들 그 누구도 이 영화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현재는 내용은 모르고 영화제목만 들어도 얼마나 유명한 작품인지 사람들이 알만큼의 작품으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걸작 영화 불후의 명작으로 남게 된 '카사블랑카'. 이 영화가 20세기 최고의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건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배우들의 명연기와 스태프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은 아니었을까요?

 

이만 오늘의 포스팅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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