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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리뷰

블랙 : 악마를 보았다 13회 (서울 경기 쾌락형 연쇄살인마 정남규)

by 지아나비 2023. 10. 3.
블랙 : 악마를 보았다 13회 (서울 경기 쾌락형 연쇄살인마 정남규)

 

블랙 썸네일
블랙 악마를 보았다

2004년에서 2006년까지의 기간은 유영철이라는 연쇄살인마의 체포 이후에도 서울 경기 지역을 공포로 휩싸이게 만든 이 남성이 활개를 쳤던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살인을 추억했던 이 범죄자는 어떻게 이런 잔혹한 범죄자가 되었을까요?

 

Contents

     

    살인을 추억하는 정남규
    살인을 추억하는 정남규(재연)

    수사관 : 범죄를 성공하지 못한 날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 날은 어떻게 했는가?


    정남규 : 예전에 범죄를 저지른곳에 가서 서있어 보았다. 너무 행복했었다.

     

    정남규 그는 어떤 범죄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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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4개월의 범행기간동안 이 남성은 13명을 살해하고 중상해를 20명에게 입히고 24건의 범행을 자행하게 됩니다. 또한 이 모든 범행 이후 검거되어서도 전혀 반성하는 기색도 없었고 태연한 모습을 보이게 되며 이 모습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분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의 범행으로는 노상에서 흉기로 습격하고 주택에 침입해 성추행 살해등을 일삼으며 방화까지 일으키는 잔악무도한 남성이었습니다. 이 남성의 이름은 정남규. 범행 기간으로 보아도 유영철의 공포가 사그라들기도 전에 연이어 연쇄살인범이라는 특정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공포를 남기기 충분했습니다.

     

    그는 검거 당시 이런 혼잣말을 하게 되는데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검거 당시 정남규의 혼잣말
    검거 당시 정남규의 혼잣말

    천명을 죽여야 하는데 너무 빨리 잡혔다. 끝났다. 안타깝다.

    정남규 그의 초기 범행 시그니처였던 노상 흉기 습격과 범행의 진화

    그는 수많은 범행을 저질렀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중 하나인 사건부터 이야기 해보자면 바로 유영철이 거짓 자백을 하고 현장검증까지 마쳤지만 결국 재판 중 거짓자백이었다며 범행을 부인했고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나왔던 사건인 이문동 사건입니다. 이는 정남규의 세번째 범행이었으며 정남규의 범행 특성 중 하나였던 노상 흉기 습격 범행이었습니다. 

     

    유영철의 거짓 자백에 화가 났던 정남규
    유영철의 거짓 자백에 화가 났던 정남규

     

    2004년 1월 30일 에서 같은 해 5월 9일까지 네 달이 채 못미치는 이 기간 동안 11건의 정남규의 노상 흉기 습격이 있었고 범행이 다시 발생하기까지 길어야 2주간의 간격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면 범행지역에서 이 범행에 대한 공포는 극에 달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됩니다.

     

    그에게 범행을 당하고 살아남았던 신길동 생존피해자의 증언을 들어보면 정남규라는 인물에 대한 공포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피해자는 뒤따라오는 남성이 강도라고 판단 자신의 가방을 던져주며 위기를 모면해보려고 했지만 가해자는 가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쫓아오며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범행 목적이 금품이 아닌 오로지 살인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줍니다. 이런 장면을 연상해 본다면 이 사건에서 생존한 생존자뿐 아니라 이 사건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공포를 느끼기 충분하다 생각됩니다. 

     

    정남규의 노상 습격이 안타까운 점은 또 있습니다. 범행 중 4건이 피해자의 집 현관문 앞에서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불과 몇발자국. 자신이 가장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기 위한 몇 발걸음이 피해자의 생사를 갈랐다는 점이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2004년 4월 22일 고척동에서 발생한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언니가 문을 열자 피해자가 엄청난 출혈을 한 상태로 문 앞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일까요? 

     

    노상 습격을 일삼던 정남규는 약간의 위기 의식을 느낀 탓인지 갑자기 범행패턴을 바꾸게 됩니다. 가택을 침입해 강도 혹은 성추행 그리고 살인과 방화까지 방법이 진화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도구였던 레저용 칼에서 식칼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범행이 나오는 뉴스를 접한 후 피해자의 생존율이 어느 정도 된다고 파악한 이유였으며 더욱 생존확률을 낮추기 위한 범행도구를 바꾸는 방법으로 진화를 꾀한 것이었습니다.

     

    정남규 그는 왜 악마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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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범행계기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추측을 해보자면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같은 남성이라는 잣대를 놓고 보자면 평균보다 왜소한 체격이었습니다. 학교 선배들은 물론 친구들로부터도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정남규를 구타는 물론 절도나 추행등의 행위를 강요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남규는 자신이 그들보다 약하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렇다할 반항 한번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점점 쌓여갔고 이 분노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인 동물들로 향하게 되었고 분풀이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사이코패스가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패턴과도 부합하게 됩니다.

     

    정남규의 학창 시절
    정남규의 학창 시절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점점 비뚤어진 성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대인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으며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성을 단 한번도 사귀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히 정남규는 내성적인 성향은 있었다고 판단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성향이 범행에 있어서는 여성을 장악하고자 하는 왜곡된 심리를 표출하게 하였고 가택을 침입해 성추행을 하며 피해자에게 있어 성적인 부분은 물론 생과 사까지 자신이 쥐고 있다는 만족감마저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그는 당연히 연쇄살인 이전에도 교도소를 드나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교도소에서도 같은 수감자에 의해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했던 범행계기를 되짚어 보자면 학교에서나 교도소에서나 자신은 남들보다 약했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고 또한 가족들도 자신을 소외시켰고 이러한 점들이 누적되어 범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말은 자신은 원래 내향적인 성격이고 범행을 저지를 인물이 되지 못했으나 모든 점들은 자신의 주위 환경들이 자신을 소외시켰고 괴롭혔으며 이러한 점들 때문에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정남규의 자기변명
    정남규의 자기변명

     

    이것은 모든 원인들을 타인에게서 찾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더해져 나온 변명에 불과할 뿐이죠.

     

    정남규 그의 범행 준비

    그는 교도소에서 연쇄살인이라는 큰 그림을 실행하기로 마음먹고 출소를 하게 됩니다. 그러한 그는 마치 운동 선수들 처럼 연쇄살인을 저지르기 위한 훈련은 물론 범행도구를 준비하게 됩니다.

     

    2003년 1월 출소한 정남규는 1년동안 나름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고 이 준비가 다 되었다 판단이 들 때부터는 주저 없이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또한 인터넷상의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게임과 인터넷의 사용을 단절했고 범행을 저지르고 난 후에는 자신의 범행을 확인하기 위해 언론 보도를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검거당시 자신의 잠자리 머리맡에는 종이 신문들이 쌓여있기도 했고 모두 자신의 범행이 기록된 신문들이었습니다. 그는 보도를 통해 자신의 살해 성공 여부를 확인 후 범행 지역을 이동하는 치밀함을 보이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기로 작정했던 날에는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이동하는 치밀함도 보입니다.

     

    그는 담배와 술을 끊고 주 3회 10km에 달하는 거리를 달리며 체력을 단련하였고 자신이 범행할때 신을 운동화들의 밑창을 다 떼어내게 됩니다. 

     

    실제로 검거당시 정남규 자택의 장독대, 창고 그리고 밥솥등에서 운동화 9켤레가 발견되었으며 모두 밑창이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웃긴 점은 자신의 범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떼어낸 미 신발 밑창이 떼어내진 족적이 정남규의 범행 시그니처가 되어버렸습니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밑창이 없는 족적이 발견된 사건 현장이 발견된다면? 이는 정남규라는 인물이 특정되지는 않겠지만 이전에 발생된 같은 족적이 발견된 범행과 같은 범인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자연스러운 추리가 이어지는데 정남규는 이는 예상하지 못한 듯합니다. 이렇듯 자신이 잔머리를 굴려 범행을 저지르지만 단편적인 생각일 뿐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정남규의 범행 도구
    정남규의 범행 도구

     

    범행도구는 칼도 물론 소지했지만 가택침입으로 바뀌게 되면서 포일복스 혹은 파이프렌치 등의 둔기도 사용하게 됩니다. 실제로 검거당시 그는 길이 40cm에 2kg의 무게가 나가는 파이프렌치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범행을 위해 소지하기에는 무겁고 큰 이 범행도구들을 범행 때마다 들고 다닐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그는 이 점을 인지하고 일반 가정집 우유주머니에 은닉 후 다음 범행에 사용하는 치밀함도 보여줍니다. 무서운 점은 이후 둔기를 보관했던 우유 주머니 안에서도 혈흔이 검출되었다는 점입니다.

     

     

    정남규 그의 범행

    그의 잔혹한 범죄는 너무 많아 모든 사건들이 열거되지는 않았지만 블랙 방송에서 소개된 몇 가지 범행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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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월 14일 저녁 9시 20분경

     

    부천 초등생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정남규(재연)
    부천 초등생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정남규(재연)

     

    집 앞 공터에서 공놀이 중이던 두 아이들이 사라집니다. 피해자들은 부천의 초등학생이었으며 각각 당시 5학년 6학년이었습니다. 둘 중 한 아이의 아빠는 퇴근길에 이들을 목격했고 또 다른 아이는 동생과 통화까지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당시는 아직 한파가 물러가지 않은 한겨울 수색 또한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2주 이상이 지난 1월 30일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사라질 때의 모습과는 달리 발견되게 됩니다. 사라진 곳에서 3km 밖 야산 중턱에서 숨진 채 발견된 아이들은 정남규가 칼로 위협해 데리고 갔으며 발가벗긴 채 독특한 결박 방식으로 결박된 채 발견되게 됩니다. 이 결박 방식은 나무뒤로 손의 손가락 세 개를 결박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독특한 방식은 정남규 본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웃에게 자신이 당한 방식이었다는 점이 진술로 밝혀집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결박한 채 목을 졸라 살해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를 숨이 넘어갈 때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는 이유로 목을 조르는 방식이 만족스러웠다 표현합니다. 

     

    또 한 가지 공교롭게도 2004년 1월 30일은 다른 범행을 저지르기도 하는 날입니다. 위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 있지만 이 날의 범행부터는 노상 습격 사건으로 사건의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시신을 결박하는 모습도 이후 모습부터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냥 자신이 범행을 저지른 자리에 물건처럼 시신을 방치한 채 도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완전범죄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며 그는 오로지 피해자의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만족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04년 1월 30일 새벽 3시 30분

    서울 구로구 빌라 1층으로 귀가하던 여성을 노상에서 습격하며 이는 노상 습격 사건의 시작이 되는 날입니다. 이후 4개월간 노상 습격 범행은 계속되며 이는 2004년 5월 9일 새벽 2시 보라매공원에서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킨 후 범행 수법을 바꾸게 됩니다. 

     

    2004년 2월 6일 저녁 7시 10분

    이문동 사건 브리핑
    이문동 사건 브리핑

    동대문 의류상가에 일하던 여성이 저녁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고 피해자를 발견한 정남규의 타깃이 되어버립니다. 난데없이 습격당한 피해자는 근처 있던 중식당에 기어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후 사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유영철이 거짓 자백했었던 이문동 사건입니다. 유영철의 거짓 자백을 보고 정남규는 너무 화가 났다는 발언도 하게 되죠.

     

    2004년 5월 9일 새벽 2시

    보라매공원을 걷던 여성이 난데없이 습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습격당시 바로 사망하지는 않았고 이것을 몰랐던 정남규는 자신의 범행이 자신이 원한대로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공원 화장실에서 자신의 범행 흔적을 없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범행흔적을 지운 후 나온 정남규는 피해자가 남자 친구에게 전화로 피습 사실을 알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 후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오인하고 도주하게 됩니다. 남자 친구의 신고로 구조된 피해자는 결국 과다 출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정남규는 가택 침입이라는 범행 방식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이는 노상에서 생존확률이 높기 때문에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범행방식으로 변경을 꾀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노상강도방식의 유사사건이 다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인근 주민들은 두려움과 경계심이 증폭되었고 자치 방범활동 또는 중고등학교의 하교시간을 앞당기는 등의 사회적 변화도 물론 한몫했지만 정남규의 소심한 성격으로 범행의 꼬리를 밟힐까 우려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보입니다.

     

    2004년 5월 19일

    20대 남매의 집에 침입한 정남규는 누나를 성추행 한 후 살해를 하게 됩니다. 이상한 인기척을 느낀 남동생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자 둔기를 이용해 기절시킨 정남규는 젓가락으로 밖에서 문을 잠근채 불을 지르고 도주를 하게 됩니다. 

     

    2006년 1월 18일 새벽 5시

     

    정남규의 잔혹한 방화 수법
    정남규의 잔혹한 방화 수법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택을 침입한 정남규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생이었던 피해자를 욕보인 것도 모자라 둔기로 살해를 자행하게 됩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방화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정말 잔혹한 것은 출입문 입구에 불을 질러 방화 후 그 누구도 출입문으로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 또한 그랬고 이 사건에서는 아버지와 삼 남매가 있었습니다. 피해자 아버지는 아이들을 깨워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불길이 너무 거세져 창으로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고 전신 화상을 입게 됩니다. 전재산 또한 소실되었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삼남매 모두 집안의 어디로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 아버지의 가장 큰 재산인 삼 남매를 모두 그 사건으로 잃게 된 것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아버지에게 경찰은 용의자로 의심의 눈초리까지 보내게 됩니다.

     

    이렇듯 널을 뛰듯 범행 방식도 범행 장소도 변경하며 수사관들을 우롱해 왔던 정남규는 어떻게 검거되었을까요?

     

    정남규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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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4월 22일 새벽 4시 40분경

    영등포 신길동 한 주택에 침입한 정남규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지갑을 뒤지게 됩니다. 그가 편취한 것은 현금 2만 4천 원과 문화상품권 1장이 전부였고 이로 인해 분노했던 정남규는 파이프렌치로 자고 있던 아들을 공격합니다. 가격 당한 아들은 천만다행으로 바로 정신을 잃지는 않았고 이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피해자의 아버지도 깨서 정남규는 2명과의 격투 끝에 제압당하게 됩니다. 경찰로 인계되는 순간에도 사실 그가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이 아닌 강도의 혐의만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갑을 채우고 순찰차에 태우려는 순간 정남규는 빠른 발을 이용해 다시 한번 도망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고 2시간 만에 2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시민의 제보로 다시 붙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단순 강도사건으로 판단되었던 이 사건은 아주 큰 사건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악의 연쇄살인마 정남규
    최악의 연쇄살인마 정남규

     

    검거 당시 소지하고 있었던 파이프렌치에서 검거 당일 피해자의 혈흔이 아닌 오래된 혈흔이 발견되었고 이는 단순 강도가 아니라는 판단을 도와줬습니다. 

     

    이후 봉천동 세 자매 사건에서 확보한 장갑 문양이었던 벌집모양 장갑흔이 일치하는 장갑도 발견되었고 시흥 모자 사건 당시 족적이 검거당시 신고 있었던 조깅화와 일치한 것을 알아냅니다.

     

    이로서 무려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해 주택 4채 건물 1채 차량 2대에는 방화를 저지른 범인 정남규는 베일을 벗게 된 것입니다.

     

    정남규 판결

    정남규 전체 사건 범행 지도
    정남규 전체 사건 범행 지도

    무려 24건의 범행으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된 정남규는 검거 후에도 사람들에게 공분을 사게 됩니다. 전혀 반성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재판정에서도 난동을 피고 현장검증 당시에는 자신을 욕하는 유족들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안하무인인 정남규는 재판 중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사회에 나가면 앞으로도 범행을 계속 할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정남규의 판결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강도, 강도살인, 강도살인미수, 현주건조물 방화치사, 살인, 살인미수, 현주건조물 방화, 야간주거침입절도, 도주, 일반 자동차 방화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남규는 2007년 4월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게 됩니다.

     

    정남규 마지막 살인

    2009년 11월 21일 서울 구치소 독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범죄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정남규였습니다. 그는 재판중에도 재판관에게

     

    정남규의 편지(재연)
    정남규의 편지(재연)

    담배도 끊었지만 살인을 참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나는 살인에 중독되었다.
    형을 집행하든 나를 좀 빨리 죽여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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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는 호소가 담긴 편지를 보내던 정남규는 결국 스스로 사형 집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는 마지막 살인의 범행을 자기 자신을 살해한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던 것입니다.

     

    정남규의 친필 편지
    정남규의 친필 편지

     

    이것이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정남규는 단 한 번도 유족이나 피해자에게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극단적인 범죄자들이 이러한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하고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꼭 인지했으며 합니다. 

     

    안하무인 유족들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남규
    안하무인 유족들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남규

    이렇게 블랙 : 악마를 보았다 13회 정남규 편을 마무리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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