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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립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VS마의태자

by 지아나비 2019. 10. 10.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립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VS마의태자


후삼국 시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경순왕의 후궁에게 추행을 가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견훤 후백제의 시조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경순왕과 그의 나라 천년을 유지하던 신라의 국격이 얼마나 바닥에 닿았는지 알수있는 대목입니다.
경순왕은 자신의 부인이었던 후궁을 추행하는 견훤을 칠 용기는 없었지만 그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그의 비를 베어서 죽여버린후 더이상의 추행을 막아주는쪽을 택한것입니다.
이처럼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은 후백제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비를 베어내고 술을 마시고 있는 경순왕에게 헐레벌떡 왕자중의 한명(훗날 이 왕자는 마의태자라고 불리게 됩니다.)이 달려옵니다.
자신의 '비를 베어내고도 술이 넘어가십니까?'라는 말에 경순왕이 대답합니다.
'누구보다도 내가 견훤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고 누구보다도 지금 참담한 기분이라고. '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후백제에게 대항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백제군에 짓밟힐 백성들을 생각하면 대항할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경순왕이라는 인물자체가 견훤이 왕으로 만들어낸 꼭두각시 같은 왕이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신라의 왕으로 즉위하기에는 신라의 민심을 이끌어낼 시간이 필요했었다고 판단한듯 합니다.
그래서 경순왕의 선대왕인 경애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견훤 자신이 좌지우지할수있는 경순왕 김부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이 사실은 태조왕건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방영되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의 견훤에게 붙잡힌 이후 자살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 신라의 52대 왕이었던 효공왕이 912년 후사없이 승하하고 난뒤 가장 유력한 계승 후보가 경순왕 김부의 父였던 김효종이었으나 박씨성의 왕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은 박씨 성을 가진 왕이었는데 뜬금없이 56대 경순왕에 즉위하게 된것은 사실상 본인의 의지나 능력이 아니었으며 견훤에 의해 옹립된 꼭두각시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즉위한 경순왕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마지막 신라의 왕으로 남게 됩니다.
야사속 이야기인것처럼 보이는 견훤이 신라의 왕의 비나 후궁들을 범한것은 사실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있으며 견훤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부하들도 똑같이 취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러던중 930년 1월 고창성전투(훗날 고창성은 안동이란 이름으로 바뀝니다.)에서 압승을 거두며 후삼국시대 우위를 지키고 있던 후백제를 크게 대파하며 후삼국의 판도를 뒤집게 됩니다.
이렇게 대승을 한 왕건은 경순왕이 있는 신라 서라벌에 승전보를 알리러 오겠다고 전합니다.
이에 마의태자는 '고려왕은 우리의 도적입니다. 우리 신라를 훔치러 온 도적에게 속지 마옵소서 폐하!'라고 상소하지만 경순왕은 미리 알리고 방문하는것은 필히 화친일 것이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승전의 연회를 준비시킵니다.

'임금께서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베와 비단을 하사하셨다.'- 삼국사기 中

신라로 온 왕건은 민심을 얻는데 열을 올린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신라 백성들은 고려의 왕 왕건에게 호감을 보였으며 
'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왕건이 오니 부모를 만난것 같다.'-삼국유사 中
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이미 천년을 지탱해온 신라라는 나라는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고 왕건의 새로운 나라 고려가 이땅에 뿌리내리는것은 이미 확실해진 시점이었습니다.

경순왕은 이미 고려로의 귀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끝까지 맞서서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마의태자의 반대는 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구도는 경순왕 VS 마의태자가 되게 됩니다.

마의태자의 이름을 딴 강원도 인제의 마을



경순왕은 '고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당장 지탱할 여력도 없는데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입장이었고
마의태자는 '우리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 비록 지금 형편이 곤궁하오나 언젠간 피지 않겠느냐?'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둘의 대립은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을 남깁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경순왕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기개있는 태자가 옳았던 것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일 것입니다.
마의태자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않는 기개를 보입니다.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이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외로움과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더 이상의 형세는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이같은 마의태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935년 결국 경순왕은 고려에게 귀부(스스로 바치다)하게 됩니다.
이에 탄식한 마의 태자는 스스로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명칭)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이로인해 마의라고 붙여졌다고 합니다.) 채식을 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의태자는 울면서 하직 인사를 하고 바로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생애를 마쳤다.' - 삼국유사 中
후에 조선시대에 들어서 뜻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마의태자의 기개가 높이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계자(왕자)도 형인 태자를 따라 가족을 버리고 개골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계자의 승명은 '범공'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김부대왕(경순왕은 승하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의 자식들은 사기에 기록된 이름이 없는바 무명씨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태자와 왕자의 이름 마의태자와 왕자는 훗날 이름없는 이들에게 후대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마의태자의 이름 '김일'은 적어도 1940년 이후에 알려지게 된것으로 이또한 사기로서는 알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마의태자의 이름의 근거는 김은열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부터라고 전해집니다. 

1784년(정조 8)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된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등을 맞이하여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이름이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한다.

경순왕이 935년 11월 태조 왕건에게 귀순합니다.
왕건은 교외에 나가 경순왕을 맞이하고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9명의 공주들중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더불어 성술부인의 소생인 부인왕씨를 후실로 삼게 하고 정승의 직위를 주게 됩니다.

'경순왕이 왕건에 귀부하자 왕건이 장녀 낙랑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 삼국사기 中

경순왕의 선택과 마의태자의 선택 읽으시는분들은 어떤 쪽의 선택이 낫다고 보시는지?

이만 마치겠습니다.

강원도 연천에 위치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릉

 

역시 연천에 위치한 마의태자 영단(신라경순왕태자경주김일지단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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