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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존 F 케네디를 배출한 미국 최고의 명문가 케네디가의 비극 또는 저주

by 지아나비 2023. 4. 7.
존 F 케네디를 배출한 미국 최고의 명문가 케네디가의 비극 또는 저주

 

명실상부 미국 최고의 가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문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35대 대통령을 역임한 존 F 케네디의 가문인 케네디 가문입니다.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 무려 400개.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대통령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죠.

 

Contents

     

    케네디가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꾼 이민자 가문

    170년간 최고의 명문가로 정재계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 낸 가문 케네디가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케네디 가문의 시작이 아일랜드계 이민자 집안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이민자 가정의 신화이며 아메리칸드림의 본보기가 된 가문이죠. 그 시작은 존 F 케네디의 증조할아버지인 패트릭 케네디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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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5년 아일랜드에는 감자잎마름병(감자역병)이라는 병이 대유행하게 됩니다. 잉글랜드에게 많은 식량을 수탈당하고 차고 넘치던 감자를 주식으로 해야만 했던 아일랜드인들에게 감자잎마름병은 치명적으로 다가옵니다. 감자잎마름병이란 감자역병균이라는 난균이 원인으로 발생해 병든 씨감자를 심었을 때 80프로의 수확량 감소를 가져오는 치명적인 감자역병입니다. 감자가 주식이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 타격이 어마어마했죠. 게다가 이 감자잎마름병은 1845년부터 185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지속적으로 계속된 흉년에 아일랜드에는 대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인구의 20프로에 해당하는 무려 100만 명이 이 대기근으로 인해 사망합니다. 

     

    감자잎마름병(감자역병)에 걸린 감자
    감자잎마름병(감자역병)에 걸린 감자

     

    참다못한 아일랜드 인들은 당시 기회의 땅이라고 여겨지던 미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무려 200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이때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때 존 F 케네디의 증조할아버지 패트릭 케네디 역시 이 인파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것은 1849년이었고 패트릭이 26살일 때였습니다. 나름 패트릭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일랜드인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규모가 2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많기도 했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종교 때문에 발생했는데 아일랜드인들은 가톨릭을 미국은 개신교를 믿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환영받지 못한 아일랜드인들은 미국 정착이 쉽지만은 않았죠.

     

    케네디 가문 가계도
    케네디 가문 가계도

     

    오히려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일자리를 구하는 많은 아일랜드 인들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NINA(No Irish Need Apply)라는 구호를 유행처럼 앞세우며 차별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대놓고 차별하는 No Irish, No Blacks, No Dogs를 걸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일랜드인과 흑인과 개는 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죠. 개와 같이 취급할 만큼 아일랜드인들을 받아주지 않았던 미국인들이었습니다. 이민 1세대였던 패트릭 케네디는 힘든 시간들을 견뎌야만 했죠.

     

    사람과 개를 동일시 하는 출입 차단 문구
    사람과 개를 동일시 하는 출입 차단 문구
    NINA(아일랜드인들은 고용하지 않음)
    NINA(아일랜드인들은 고용하지 않음)

     

    케네디가문 부를 축적하다.

     

    패트릭 케네디의 아들 이민자 2세대가 된 패트릭 조셉 케네디가 사회로 나서게 되면서 케네디가의 형편은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패트릭 조셉 케네디는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던 아일랜드인들이 육체노동을 주로 맡게 되었고 고된 일을 마친 후 기쁨을 술도 한잔 하면서 향수를 달래고 하루의 피로를 풀던 펍형식의 술집을 경영하게 됩니다. 패트릭의 이러한 공략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이로 인해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됩니다. 

     

    패트릭 조셉 케네디
    패트릭 조셉 케네디

     

    또한 술집 경영으로 돈과 신임을 얻은 패트릭 조셉 케네디는 다른 꿈을 꾸게 되는데 이제 돈이 아닌 권력해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는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주의회 의원에 출마하게 되고 1884년 매사추세츠주의 하원의원으로 시작해 상원의원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케네디가는 부와 더불어 권력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패트릭 조셉 케네디가 운영했다고 하는 펍
    패트릭 조셉 케네디가 운영했다고 하는 펍

     

    케네디가의 부와 권력 중심의 인물

    패트릭 조셉 케네디와(오른쪽) 조셉 케네디(왼쪽)
    패트릭 조셉 케네디와(오른쪽) 조셉 케네디(왼쪽)

     

    패트릭 조셉 케네디가 명문가의 기반을 닦고 부와 명성을 이루기 시작했다면 그의 아들 조셉 케네디는 실질적인 케네디가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경제와 경영을 공부했고 당시 아버지가 대주주였던 은행에 취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과 25살의 나이에 은행장을 맡게 되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는 불법사업에 손을 대게 되는데 그 기회는 미국의 금주법이 시행되면서 찾아옵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영토 내에서 알코올이 든 음료를 양조, 판매, 운반, 수출입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이때 캐나다의 술을 몰래 수입해 와 1920년대 밀주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 마피아들이 금주법 시행 때 밀주를 통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조셉 또한 마피아와의 결탁을 통해 이 불법사업인 밀주를 통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게 됩니다. 시카고의 마피아 대부였던 샘 지앙카나라는 인물과고 깊은 친분을 유지했는데 이 샘 지앙카나라는 인물은 조직원 5만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때 현재가치로 2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게 됩니다. 한화가치로 2조 5천억 가량 되는 돈이죠. 

     

    마피아 대부 샘 지앙카나
    마피아 대부 샘 지앙카나

     

    이에 편승한 조셉 케네디는 마피아와의 결탁으로 엄청난 재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하지만 조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불법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이제 미국 금융의 중심시 월 스트리트에서 주가조작에 가담하게 됩니다. 작전주를 매입한 그는 높은 값에 팔아 이익을 남겼고 엄청난 차액으로 인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게 되죠. 이처럼 돈을 버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조셉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업으로 이제 그는 할리우드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소규모의 스튜디오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그는 중소규모의 스튜디오를 매입 후 합병해서 부피를 키우고 매각하는 공격적인  M&A를 통해 더욱 부를 축적하게 되죠.

     

    뿐만 아니라 직접 RKO라는 영화사를 설립하고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영화사 100년 명작 중 1위에 빛나는 영화 시민 케인(1941), 킹콩(1933)등의 영화 배급으로 5대 메이저 스튜디오 중 하나로 자리도 잡게 됩니다. 이전 포스팅의 카사블랑카가 3위를 기록한 그 순위차트입니다. 

     

    이렇게 갖가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그는 1957년 포츈 잡지가 선정한 미국 내 부자 순위 15위에 드는 부자로 손꼽히게 됩니다. 그가 별세한 후 남은 자산은 현재가치로 약 3조에 이른다고 하니 이후 권력을 얻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확보된 셈입니다. 

     

    조셉은 1934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1938년 주영국 미국 대사로 임명됩니다. 갑자기 정계로? 향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뒤에 숨겨진 조력자인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셉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선거할 때 상당한 정치 자금을 후원했고 일종의 투자결과로 인한 소득으로 주영국 미국대사를 맡게 된 것이죠. 이는 유명인사들과 인맥 형성기회를 만들어줬고 케네디가가 명문가 반열에 오르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명문가를 이루기 위한 필수조건이 있었으니 바로 가족입니다. 1914년 역시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보스턴 시장까지 지낸 권력가 집안의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한 후 무려 9명의 자식들을 낳게 됩니다. 순서대로,

     

    로즈 피츠제럴드
    로즈 피츠제럴드

     

    조셉 케네디 주니어

    존 F 케네디

    로즈메리 케네디

    캐슬린 케네디

    유니스 케네디

    패트리샤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진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이중 네 명의 아들은 모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버드를 졸업하게 됩니다. 하버드는 청교도에 의해 세워진 대학으로 이민자 출신의 가정에서 들어가기도 어려운데 이 케네디 가문에서 2대에 걸쳐 총 5명의 하버드 합격자를 배출한 것입니다. 아들들 모두가 하버드로 들어가게 되면서 케네디가는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이때 자식들을 모두 하버드에 입학시킨 엄마 로즈 케네디의 교육방법도 주목받게 되는데 그녀는 엄하기로 유명했고 매를 아끼지 않았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방에 가두기도 하는 등 무서운 '타이거 맘'의 원조였다고 합니다.

    그녀가 자식들을 엄히 다스리는 데는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잠언 13장 24절 'Spare the rod and spoil the child',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는 구절을 인용해 자신의 교육관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엄히 다스릴 뿐 아니라 아이들의 창의성을 위해 매일 저녁 식사는 온 가족이 하며 식사자리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형식의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사회 전반의 다양한 주제를 정해 그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프리토킹 형식의 토론이었죠.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현실성 있는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토론을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케네디가의 비극 혹은 저주

    이런 9명의 자녀들 중 첫째와 둘째인 조셉 케네디 주니어존 F 케네디의 경쟁심은 남달랐다고 전해집니다. 사소한 경쟁에도 진심이었고 그 둘은 가족이자 라이벌로 서로를 인식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둘의 경쟁심은 이어집니다.

     

     

    형인 조셉 케네디 주니어는 어려서부터 우수한 학업 성적과 뛰어난 운동신경을 지녔으며 학생회 간부를 지냈습니다. 말 그대로 엄친아였고 아버지 조셉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장남에 대한 기대가 컸었죠.

    둘째인 존 F 케네디 또한 형에 미치진 못했지만 학업성적도 우수했고 뛰어난 운동신경을 지녔으며 미식축구는 주장을 할 정도였고 수영팀으로도 활약했습니다. 강한 승부욕은 형에게 지지 않았죠.

     

    이 둘 중 먼저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동생인 존 F 케네디였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차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고 해군에 자원에 해군장교로 복무하게 됩니다. 그가 참전할 당시 25살이었던 그는 초계 어뢰정의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죠. 근데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통보받았습니다. 신체검사가 불합격인데 어떻게 해군장교로 참전하게 되었을까요? 이는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미국 2차 대전 때 활동한 모터가 달린 어뢰정으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가장 빠른 배중 하나로 알려진 PT109호를 타게 된 그는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일본군 구축함에 들이 받혀 2명이 즉사하고 배는 격침당하게 되죠. 이때 존 F 케네디는 허리를 다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하의 구명조끼 끈을 입에 물고 인근 섬까지 헤엄쳐가게 됩니다. 무려 1주일간 쉬지 않고 헤엄치며 끊임없이 구조요청을 하게 되었고 그의 초인적인 능력으로 이미 사망한 2명을 제외한 자신 포함 11명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내게 됩니다.

     

    이일로 존은 무공훈장을 받고 전쟁영웅으로 언론에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1943년 8월 20일 뉴욕타임스의 기사에는 '케네디의 아들이 태평양의 영웅이 되다.;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적 행복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일화로 남게 되었죠. 그런 그는 하버드 졸업생에다 케네디가의 아들 그리고 더해 전쟁일화까지 자신의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

    이에 반해 다른 케네디에게 첫 번째 비극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왼쪽부터 조셉 케네디 주니어, 조셉 케네디, 존 F 케네디
    왼쪽부터 조셉 케네디 주니어, 조셉 케네디, 존 F 케네디

    첫번째 비극

    존 F 케네디의 입대 세 달 전 형이자 장남인 조셉 케네디 주니어 또한 해군에 지원했고 해군에 소속한 비행기 조종사가 됩니다. 장남에 대한 기대가 존에 비해 더 컸던 아버지 조셉은 만류했지만 더는 말릴 수 없었던 것이 이후 정치적 행보를 꿈꾸고 있던 조셉 케네디 주니어였기에 이후 정치 행보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의 입대는 정치계에 입성하기 위한 큰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조셉 케네디 주니어
    조셉 케네디 주니어

     

    그런 조셉은 대잠수함 초계비행 중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때는 1944년 8월 12일 오후 6시 비행을 나선 조셉은 이륙 후 12분 후 낙하산을 타고 내리기 전에 공중에서 비행기가 폭파하는 사고를 겪게 됩니다. 전사한 것입니다. 이는 케네디가의 첫 번째 비극으로 이 사건이 더 안타까운 것은 사실 조셉은 의무 전투 횟수를 다 채웠고 전역이 가능한 상황이었단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왜 비행을 나섰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동생에 대한 경쟁심이 비극을 불러왔다는 추정이 가능해집니다. 동생인 존은 이미 무공훈장까지 받고 전쟁영웅으로 거듭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아버지 조셉의 권력에 대한 갈망은 첫째에게서 둘째인 존 F 케네디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이때 존의 장래희망은 언론이나 법률분야로 진출하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정치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정치가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바람대로 법학대학에서 공부를 더 했을지도 모르죠. 실제로 존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형의 삶을 채우고 있는 중이야.' 아버지의 기대로 인해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단 뜻이죠. 애초의 그의 마음가짐과는 상관없이 대중들은 그를 원했고 1946년 29살의 나이로 존 F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주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3선 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게 됩니다. 

    두 번째 비극

    이렇게 존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무렵인 1948년 28살이었던 존의 동생이자 조셉의 4번째 자식인 캐슬린 케네디가 갑작스레 사망하게 됩니다. 1948년 28살이었던 캐슬린은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를 겪게 되고 이때 목숨을 잃게 되죠.

    이것이 케네디가에 닥친 두 번째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존은 여전히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1958년 상원의원 재선도 성공하게 됩니다. 드디어 대선을 앞두었고 2년 후의 민주당 유력 대권후보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때 그를 연사로 초청하는 일이 2500건이었고 실로 정치 아이돌의 인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캐슬린 케네디
    캐슬린 케네디

     

    드디어 대선에 이름을 올린 존 F 케네디. 하지만 상대 후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공화당의 후보로 나선 인물은 리처드 닉슨. 훗날 37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죠. 사실 이때 현직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기중이었는데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임기말에 이르러서도 60프로의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리처드 닉슨으로 이어지는 공화당 측이 유리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이 판세를 뒤집을 카드가 존 F 케네디에게 주어집니다. 처음으로 TV를 통한 대선후보들의 토론자리가 마련된 것이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공략한 존이었습니다.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1960년 9월 26일 첫 번째 토론의 시청자가 약 7천만 명. 미국인구의 3분의 1이자 유권자의 대부분이 이 방송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토론 내내 자신감 있어 보였고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임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준비한 스튜디오와 자신이 입게 된 옷의 배색을 고려해 닉슨에 비해 도드라지게 보이는 법을 알았습니다. 반면 닉슨은 말을 더듬고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더해 불편한 다리 탓에 자세도 불안정해 보였고 땀까지 흘리는 모습을 보였죠. 이미 이때 존 F 케네디는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법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보이는 이미를 세심하고 철저하게 준비했고 대성공을 이뤄냅니다.

     

    토론 전 닉슨에 비해 지지율이 낮았던 존 F 케네디는 토론 이후 닉슨의 지지율을 넘어서게 됩니다. 상승하는 케네디의 지지율과 함께 케네디가를 비난하는 수위 또한 높아졌습니다. 특히 존의 아버지 조셉에 대한 풍자도 많아졌죠.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 아버지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높아졌습니다.

    세 번째 비극

    케네디가의 모든 가족들이 존 F 케네디의 대선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곳곳을 누비며 활동하던 시기 11명의 케네디 가문에서 유일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케네디 가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셋째 로즈메리 케네디. 케네디가는 이런 사실이 알려진 후 해명을 올리게 됩니다. 시카고의 트리뷴지에 위스콘신 소재 가톨릭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케네디의 대선활동을 위한 어떤 활동도 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로즈마리 케네디
    로즈마리 케네디

     

    이에 논란은 잠잠해졌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실상은 로즈메리는 가톨릭이 아닌 특수학교의 그것도 선생이 아닌 학생이었고 1918년 출생당시부터 지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던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녀는 공격성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에 케네디가의 위신이 먼저였던 조셉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게 됩니다. 그것보다 충격적인 건 당시 공격성을 제거하기 위해 당시로서도 현재로서도 위험한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합니다.

     

    이 수술은 인간의 두뇌에서 전두엽을 제거하는 시술로 수많은 문제점과 부작용이 보고되는 수술로 현재 시행은 되고 있지만 극히 제한적인 부분에서만 시술되고 있는 위험천만한 수술이었습니다. 조셉으로서는 딸의 지능을 높이고 공격성을 낮추려고 한 시도였지만 사실상 그것은 10살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던 로즈메리의 지적 수준을 3살 아이로 퇴행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조셉은 가문의 치부를 감추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후 평생을 요양원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한 로즈메리. 그녀를 위한 방문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사실상 요양원에 버려버린 것입니다. 조셉은 심지어 아내인 로즈에게도 로즈메리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고 20년 넘는 시간을 딸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2005년 로즈메리가 사망하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이때까지 케네디가의 거짓해명으로 잠잠해진 여론으로 존은 대선가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취임하게 됩니다. 43살의 미국 최연소 대통령이며 최초의 가톨릭 신봉자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죠. 그는 유명한 취임사도 남겼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으십시오.'

     

    이날 취임식에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이미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PT109호의 모형이 돌아다녔고 존 F 케네디의 얼굴모습을 딴 불꽃놀이도 진행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성대한 취임식이었습니다. 뉴 프런티어 새로운 개척자 정신을 앞세운 존 F 케네디는 진보적인 정치행보를 보입니다.

     

    인종차별을 폐지하고 사회복지를 확산하고 아폴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앞서 나가는 미국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그의 성공에는 숨겨진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내였던 31살의 재클린 케네디. 뛰어난 패션감각으로 유행을 선도했던 그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남편의 숨겨진 조력자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일하던 재클린은 소개팅으로 존을 만났고 같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아일랜드계 이민자 집안이었고 취미마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운명처럼 만난 둘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딸 캐롤라인과 둘째 존 케네디 주니어를 낳고 완벽한 가족의 표본을 보여줬습니다.

     

    존  F  케네디의 수많은 염문설

    하지만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존의 추악한 민낯이 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민낯이란 완벽해 보이는 가정을 두고도 끊임없이 불륜을 저질렀단 사실입니다.

     

    -마를렌 디트리히라는 독일계 배우와의 불륜 이 마를렌이라는 여성은 존 F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과도 염문설이 있었던 여성입니다.

     

    마를렌 디트리히
    마를렌 디트리히

     

    -주디스 캠벨이라는 여배우와의 염문설. 이 여성은 조셉에게 도움을 주었던 마피아 샘 지앙카나의 정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이 여성은 자신이 케네디와 샘 지앙카나의 연결고리가 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디스 캠벨
    주디스 캠벨

     

    -파멜라 트루누어라는 여성은 무려 존의 아내였던 재클린을 보좌하던 언론 비서관이었습니다.

     

    왼쪽 파멜라 트루누아 오른쪽 재클린 케네디
    왼쪽 파멜라 트루누아 오른쪽 재클린 케네디

     

    -미미 엘포드라는 여성은 무려 50년 뒤 회고록에서 존 F 케네디가 백악관의 은밀한 곳을 보여주겠다며 침실로 유인 1년간 내연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렸습니다.

     

    미미 엘포드
    미미 엘포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메릴린 먼로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였죠. 1962년 5월 19일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메릴린 먼로가 직접 생일 축하곡을 부르는 장면은 아직도 확인할 수 있죠. 하지만 이때 둘은 이미 연인관계였다고 합니다. 또한 마릴린 먼로는 동시에 존 F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와도 염문설이 있었습니다.

     

    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

     

    그럼 재클린 케네디는 이 사실을 몰랐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어느 날 메릴린 먼로가 전화가 와서 존이 자신에게 결혼하자라고 했다며 재클린에게 이혼하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재클린은 먼로에게 백악관 들어와 영부인을 하라며 국가 모든 문제를 가져가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죠. 물론 위에서 밝힌 인물들이 다는 아닙니다. 무려 100명에 달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이미 백악관 내에서는 유명했다고 합니다.

     

    생일 축하곡을 부른 먼로는 3개월 뒤 1962년 8월 4일 36살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먼로의 죽음 또한 의혹투성이인데 검시관의 타살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 논란은 증폭되고 사람들은 타살당한 이유를 추측했습니다. 물론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로 공식적 발표는 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고 의문스러운 죽음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죠. 존과의 관계를 통해 국가기밀을 많이 알게 된 메릴린 먼로를 지켜보지 못한 CIA에서 국가 안보차원에서 타살했다는 음모가 대표적인 음모론입니다. 

     

    이런 모든 스캔들에도 전 국민에게 지지를 받는 케네디. 그것은 참모진과 재클린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필사적으로 존 F 케네디의 사생활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았고 이 덕분에 케네디가의 명성은 드높아져만 갔습니다.

    네 번째 비극

    1964년 재선을 위해 지지율이 낮은 지역 관리차원에서 정치적 험지인 텍사스로 향한 케네디 부부. 1963년 11월 22일 그들은 샌안토니오, 휴스턴, 포트워스, 댈러스, 오스틴의 2일간 5개 도시를 순방할 계획이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보수적 성향이 강한 텍사스는 그의 재선을 위해 꼭 필요한 지역이었기에 순방을 계획한 것입니다. 진보적인 성향의 존 F 케네디의 정치방향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많았던 댈러스로 향한 날이었습니다.

     

     

    카퍼레이드가 이어졌고 앞 좌석엔 텍사스 주지사 부부가 뒷좌석엔 케네디 부부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존이 축 늘어집니다. 이에 이상함을 느낀 재클린은 놀라 남편을 보는데 이때 한 발의 총성이 더 들리고 그것은 존 F 케네디의 머리를 관통하게 됩니다. 그의 유세현장이 참사현장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되지만 30분 만에 사망한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지 3년 만에 46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건의 그날 앞줄엔 텍사스 주지사 부부 뒷줄엔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케네디
    사건의 그날 앞줄엔 텍사스 주지사 부부 뒷줄엔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케네디

     

    범인은 리 하비 오스왈드 텍사스에 있는 교과서 창고의 6층 창문에서 저격을 한 것입니다. 저격한 후 그는 오후 2시에 영화관에 숨어있다 체포됩니다. 오스왈드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모든 증거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오스왈드는 다른 구치소로 호송되던 중 케네디를 지지하던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의 총격을 받고 사망합니다. 오스왈드의 범행이유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고 이에 또 수많은 음모론이 양산되죠. 이날 바로 옆에서 존 F 케네디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재클린은 워싱턴으로 돌아와서도 자신이 입고 있던 핑크색 드레스를 벗지 않고 혈흔이 묻은 그대로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녀는 그 이유를 범인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갈아입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리 하비 오스왈드
    리 하비 오스왈드
    잭 루비
    잭 루비

     

    다섯 번째 비극

    다섯번째 비극은 케네디의 남동생 로버트 케네디 였습니다. 그는 존 F  케네디의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그는 존이 상원의원 선거를 치를 때부터 대통령 선거까지 선거를 총괄해 도와주는 형의 가장 큰 조력자였죠. 존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로버트는 법무부장관에 임명됩니다. 비공식적이지만 워싱턴의 이인자로서 형을 보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조력자였습니다. 그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부터 조직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사실 케네디 가문은 오랜 세월 마피아와의 결탁을 공공연히 해왔음에도 그는 아랑곳 않고 자신만의 정책을 펼쳐 나갑니다. 이에 화가 난 마피아도 가만있을 수 없었고 로버트를 협박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또 다른 동생인 에드워드도 협박합니다. 

     

    로버트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그런 로버트는 형이자 대통령이 죽음을 맞이한 후 법무부장관을 사임하고 백악관을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정치적 행보를 이어갑니다. 1964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후 1968년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게 됩니다. 사실상 대통령 당선이 유력했던 로버트 케네디.

     

    1968년 6월 5일 로스앤젤레스 한 호텔에서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축하연설을 하던 로버트. 연설 후 기자회견 장소로 가기 위해 사람들을 피해 호텔 주방 쪽 통로로 향한 로버트를 향해 총격이 가해집니다. 총알은 로버트의 머리를 관통했고 병원으로 옮겨진 로버트는 총알 제거 수술을 받게 되지만 25시간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 42살.

     

    범인은 팔레스타인 이민자였던 시르한. 그는 로버트의 친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그것이 암살 동기라고 밝혔지만 이후 범행을 부인하는 등 이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정작 로버트에게 원한을 품었던 마피아 개입설도 있지만 그것은 밝혀진 사실은 없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까지도 복역 중이며 최근까지도 가석방에 대한 심의가 이어졌으나 최종 거부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르한 비샤르 시르한
    시르한 비샤리 시르한

     

    1968년 6월 8일 세인트 패트릭성당 앞은 200만 명의 인파가 몰리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또한 워싱턴으로 로버트의 시신이 운구되는 동안 기차역마다 경례로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습니다.

     

    이에 가족들의 비극을 지켜보는 아버지 조셉은 어땠을까요? 그는 존이 암살당하기 1년 전인 1962년 뇌출혈을 겪었고 투병생활 중이어서 아들들의 비극을 지켜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는 로버트가 숨진 다음해인 1969년 투병생활중 생을 마감합니다. 

    여섯 번째 비극

    케네디가의 마지막 아들이자 9번째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 그 또한 형들을 따라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상원의원 선거자격이 주어지는 30살이 되자마자 상원의원에 출마했고 당선되게 됩니다. 또한 가문의 이름을 업고 승승장구하는 그는 유력한 대권후보로 떠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스캔들에 휘말리게 됩니다. 일명 차파퀴딕 사건. 여섯번째 비극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1969년 7월 18일 선거운동원들을 위한 파티에 참석한 이후 운전하며 돌아가는 길에 차가 난간을 들이받으며 침수되는 사고를 겪게 되는 에드워드. 그는 구사일생으로 헤엄쳐 나와 목숨을 건지지만 사건은 이후에 발생합니다. 이후 어부들이 전복된 차를 발견하고 사고상황을 알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차에는 한구의 시신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시신의 정체는 에드워드의 여비서였던 메리 코페친. 당시 에드워드는 차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건진 후 사고 상황을 10시간 넘게 알리지도 않았고 다시 파티 장소로 돌아가는 기행을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차에 누군가 있었다면 10시간 넘게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에 수많은 의혹들이 더해집니다. 음주운전, 메리와의 부적절한 관계등의 의혹이 불거지지만 에드워드는 다 부인하게 되죠. 그리고 어이없게도 재조사 또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2개월에 1년의 집행유예 1년의 운전면허정지 처분만 받게 되고 사건이 일단락됩니다.

     

    에드워드와 메리 코페친
    에드워드와 메리 코페친

     

    더더욱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소식도 있었습니다. 사고 즉시 메리는 사망한 것이 아니라 차 안에 발생한 에어포켓으로 인해 4시간 정도 생존하다가 결국 공기가 사라진 후 질식해 사망했다고 알려져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에드워드를 향한 분노로 이어집니다. 훗날 이 사건은 파티가 벌어졌던 장소인 차파퀴딕 별장의 이름을 따 차파퀴딕 사건으로 불려지게 됩니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블랙 워터'도 있습니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에드워드는 입장을 발표하는데 매사추세츠의 주민들이 원하면 그만둘 수도 있다는 애매한 말을 남기고 사임문제를 유권자에게 떠넘기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유력한 대권주자에서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사고는 에드워드밖에 모르는 사건이 되었고 여전히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1962년부터 2009년까지 매사추세츠주의 상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비록 대선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정치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9년 8월 25일 그는 뇌종양으로 인해 눈을 감습니다.

     

    이후에도 이어지는 비극들

    로버트 케네디의 넷째 아들 데이비드 케네디 1984년 28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호텔방에서 약물과다복용으로 사망

    3살 때 아버지를 잃은 존 케네디 주니어는 변호사 및 저널리스트로 맨해튼의 저명인사로 성장하지만 1999년 38세로 경비행기 사고로 부부가 사망

    에드워드 케네디의 딸 카라 앤 케네디 2011년 51세의 나이로 운동하다 심장마비로 사망

    로버트 케네디의 손녀 시어셔 힐 케네디 2019년 22세의 나이로 약물 중독으로 사망

    로버트 케네디의 손녀 매브 케네디 맥킨(40)과 그녀의 아들(8) 2020년 카누를 즐기다 실종 후 사망

     

    비극 혹은 저주를 받은 가문 케네디가

     

    이민자 가문으로서 개척자 정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한 가문. 도전정신과 개척정신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큰 울림을 주고 있는 케네디 정신. 비록 과한 야망과 성공을 향한 집착으로 집안의 비극을 맞이했지만 케네디가의 정신은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가문의 빛과 어두움의 단면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케네디 패밀리
    케네디 패밀리

    이번 포스팅은 벌거벗은 세계사 89회를 토대로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관련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해당 회차를 찾아 보시는 것을 권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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